지난 4월, 이상하리만치 갑자기 추워진 파주에서 정병규 선생님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열화당 책박물관에서 소장 잡지를 전시하는데, 정선생님이 초대 연사로 한국의 잡지라는 매체에 대한 당신의 생각과 후배들을 위한 잡지 디자인론을 간략하게 나누어 주신 것이다. 한국 잡지 역사의 키워드는 ‘계몽’—‘투쟁’—‘카탈로그’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파티 디자인인문연구소의 최범 선생님이 모 디자인 잡지를 ‘디자인 포르노’라고 평하신 것이 떠올랐다. 일맥상통했다. 가장 잘 팔아치우기 위한다면 카탈로그가 포르노가 되는 것보다 손쉬운 방법이 있을까.
나는 파티 디자인인문연구소에서 그림책과 타이포그라피라는 주제로 그림책이라는 매체의 시각 언어를 연구하고 있다. 수업 준비를 위해 강연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한국의 60~80년대 어린이 문학과 그림책을 살펴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정선생님이 60년대에 발행된 독일 잡지 twen의 스프레드를 보여주며 잡지 디자인을 이야기하실 때,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한국 어린이 책의 모습이 순식간에 대조될 수밖에 없었다. 60년대 독일 잡지 디자인과 한국의 어린이 문학책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런 잡지를 만드는 사회가 만들어낼 어린이 책의 만듦새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기에, 씁쓸했다.
어쩌면 잡지—까짓게 뭔데—라는 생각이 주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찬찬히 한국의 잡지, 영국, 독일, 일본의 잡지와 그 사회를 떠올려 보면 잡지가 한 사회의 시각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시각 문화가 얼마나 큰 부분 한 사회의 욕망과 욕망 해소의 방식을 대변하는지 보면 잡지를 ‘한 나라의 문화를 보여주는 종이로 만든 거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또 사람들이 책은 잘 안 봐도 잡지는 비교적 손쉽게 사보기 때문에 파급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때문에 식민지를 겪은 한국인들이 그토록 청년 잡지, 어린이 잡지에 우선 힘을 쏟았는지도 모르겠다. 안타까운 것은 그 에너지가 대부분 ‘계몽’과 ‘투쟁’에 쓰이고 지금 디지털 시대의 종착역이 ‘카탈로그 잡지’가 돼버렸다는 점이다.
시각 매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해당 문화권의 욕망을 이해하는 일이고, 욕망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 사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일이다. 정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전시된 한국, 외국 잡지를 보면서 한국의 시각 매체 역사를 살펴보는 일, 좀 더 구체적으로 ‘한국 그림책의 역사를 연구하는 일’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현재 한국 그림책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다룬 연구는 없다. 역사도 짧지만, 그림책 독자의 대부분이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계층이기 때문에 그만큼 만듦새에 대한 기대 수준도 높지 않고, 따라서 관심을 기울이는 이도 적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특히 문학 관점이 아닌 디자인이나 시각 매체 관점에서의 연구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위 ‘어린이’로 분류되는 독자들의 소박한 책에 대한 ‘의견’은 권위 있는 ‘비평’으로 보이지 않고, 소위 ‘어른’으로 분류되는 우리도 내 자식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책에는 대체로 관심갖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근대 원본 자료에 대한 접근성도 많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자료, 외국 자료 모두 마찬가지다. 대중에게 개방된 자료는 거의 없고 희귀 자료는 거의 개인 소장으로 그나마 한국에는 몇 있지도 않다.
취업이 안되는 학과가 당연한 듯이 통폐합되는 이 시대에 어린이들이 보는 인쇄 매체의 시각 언어를 고민하는 일은 사치스러운 짓이 되어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 전면적인 자료를 갖추고 지속 가능한 연구 지원이 있는 어린이 문학 박물관, 그림책 박물관은 그저 상상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시각 매체가 가진 공공성을 생각하면 상상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되고, 오히려 상상의 내용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떠들어야 한다.
시각과 촉각 등의 감각이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충분하다. 이 여러 가지 감각은 모여서 하나의 독특한 미감을 만들어내고 그것은 에너지가 된다. 에너지는 변화를 가져온다. 이 시대에 우리가 미감으로 무엇인가 바꿀 수 있다면 시도해볼 만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그림책이라는 매체는 일정 기간에는 부모가 읽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있고 이때 하나의 그림책이 두 개의 서로 다른 계층을 독자로 삼으면서 가장 친밀한 방식으로 문화적 밈(meme)을 전달하는 역할을 해낸다. 여기서 우리는 그림책의 더 큰 공공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책의 내용 면에서는 다양한 연구와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림책을 완성하고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내용에 몸을 만들어 주는 일, 즉 파라텍스트를 섬세하게 디자인하는 일이다. 이 작업에 영감을 주고 단절된 시각 매체 역사의 연결성을 만들어 줄 수 있는 탄탄한 연구가 절실한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많은 한국의 그림책 생산자들이 순전히 자신의 호기심에 기대어 그림책을 공부하고 수집해왔다. 나 또한 앞으로도 한국 그림책의 과거를 계속 돌아볼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호기심과 몇몇 출판사의 노력에 기대어 이 분야의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다.
정선생님은 스기우라 고헤이의 잡지 『긴카(銀花)』(*일본의 전통문화를 다룬 잡지)를 예로 들면서 지금이라도 출판계에서 힘을 모아 이런 가보지 않은 영역의 끝내주는 잡지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지, 그것이 우리의 미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제안하셨다. 나는 그 이야기를 —‘그림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보지 않은 영역에 대한 도전이 필수다—라는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도전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매체를 만들어온 한국의 역사, 그리고 그들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작업은 분명히 업계 전문가와의 소통을 통한 제대로 된 정책 수립과 효율적인 실행, 즉 ‘공공의 힘’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