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예술 작품’이라는 단어는 ‘부자를 위한’이라는 속뜻을 품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예술품이 가진 희소성에 기인하는데 대부분 복제되지 않는 ‘오직 한 점’ 이기 때문이다. 보통 명품이라 불리는 것을 상대적으로 높은 희소성과 높은 가격으로 많은 사람이 가질 수 없게 만든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자유주의 사회 안에서는 가격으로 모든 가치가 환산되지만, 이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가는 또 다른 문제다. 예술에 ‘시장 가격’을 필수 속성으로 포함하지 않을 수 없을까? ‘예술’이라는 단어가 가진 권위를 잠시 내려놓을 수는 없을까? 물론 이렇게 되었을 때 대중이 그것을 예술작품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그 인정을 끌어내는 것은 예술 자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나는 그런 예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만든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들의 작품은 아름다우면서 높은 희소성을 가진다. 일본의 그림책 작가 초 신타는 ‘아이들의 그림을 보면 그 아름다움에 질투 나고 정말이지 불쾌해집니다.’라는 말로 아이들의 그림이 가진 아름다움을 역설한 바 있다. 그 외에도 많은 대가가 아이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왔다. 물론 아이의 작품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작품만큼이나 희소하다. 부모, 조부모 많아야 5명이 안 될 것이다.
여기서 ‘소유하고 싶어 한다(desire)’와 ‘소중히 여긴다(cherish)’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넘어가자.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그 대상이 교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라도 시장 가격이 내려가면 대부분 사람은 그 작품을 더는 크게 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아이가 만든 작품은 시장을 위한 것이 애초에 아니었기에 시장 가격이 없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가진 추억의 의미와 이미 커버린 아이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가족에게 그 가치는 오히려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단지 이런 이유라면 아이의 작품이 가진 가치가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의 작품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바로 소통의 매체가 된다는 점이다. 난 이것이 어떤 작품을 예술이라고 부르는데 필요한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작품이라는 것은 대단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 수 있으나, 그것은 분명 한 인간이 자기의 잠재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대다수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읽고 싶어 한다는 분명한 동기가 있다는 전제로 우리는 작품을 매개로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난 여기에 아이의 작품이 가진 또 다른 큰 힘이 있다고 믿는다.
사실 나는 모든 아이가 태어날 때 이미 예술가로서의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른의 역할은 아이가 자기 안의 예술가를 죽이지 않고 그저 아이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떨까? 부모 역시 아이와 함께 예술가로 살 수 있다. 언제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아이를 위한 무언가를 만드는 작업자가 될 때, 그리고 아이를 위해 그림책을 큰 소리로 읽으며 구연동화 연사가 될 때이다. 어떤 형태로든 무엇인가를 매개로 아이와 마음, 감정, 생각을 나눌 수 있을 때 그것은 예술이 된다. 한 가족을 위한 예술인 것이다. 물론 이런 인식이 있는 어른이 많은 사회를 만드는 것은 단지 몇 명의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생각을 확산할 수 있도록 교육 내용과 환경이 변화해야 한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모두 예술가가 되어야 하는가? 권위와 시장 가치라는 거추장스러운 외투를 벗어 던진 예술이라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 예술이 무엇인가는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내가 믿는 예술은 한 사람이 ‘참다운 개인’으로 설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참다운 개인이란 무질서하게 개성을 드러낼 권리만 강조하지 않고, 사회와 자연을 배려하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사회 구성원 하나하나가 참다운 개인이 될 때 비로소 ‘소통’이 가능한 사회가 된다. 소통은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해야 가능하다. 예술의 여러 기능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다. 따라서 1%의 천재 예술가 몇 명의 결과물보다도 보통 사람들의 예술 활동과 이를 소중히 여기는 사고의 전환을 통해 이 사회가 ‘사람 중심’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디자인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도 바로 이런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는 교육 매체와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닐까. 동시에 당연하지만 여전히 제대로 되지 않고 있어 또 꺼내기 너무 낡아버린 주장인 노동 환경 문제가 있다. 바로 정부와 기업이 더 많은 사람이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노동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의도와 매체가 있다고 해도 지금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퇴근 시간과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모든 게 소용없다. 이렇게 아이의 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나만의 작업을 하는 어른이 많아져 이것이 생활로 자리 잡을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예술 문화 운동’으로 부를 만한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지금까지 한 예술 경험 중 최고의 경험을 꼽자면 이탈리아 두오모 성당을 보거나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았을 때도 아닌, 바로 내 아이에게 초 신타의 「샐러드 먹고 아자!」를 읽어주었을 때다. 내 허벅지를 소파 삼아 앉은 아이가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들으며 깔깔대며 웃을 때 내 몸에 느껴지는 가벼운 진동, 내게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이상한 질문을 던지고 생각지도 못한 해석을 들려줄 때, 난 그림책이 바로 내가 끝까지 함께 하고 싶은 예술 매체라는 것을 알았다. 늙어서도 그림책을 충분히 즐기면서 살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삶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품게 되었다.
그림책은 아이가 태어나서 접하게 되는 첫 번째 예술 장르다. 그런 그림책을 우리는 좀 더 신중하게 고르고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좋은 그림책이 많이 있지만, 서체의 선택이나 책이라는 물성을 고려한 다양한 작품이 없어서 아쉽다. 아이를 삶의 주인(主體)이 아닌 손님(客體) 대접을 하거나, 가르치고 지도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책을 만드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여전히 그림책은 매력이 큰 매체다. 독자가 주도할 수 있는 ‘이야기(narrative)’라는 강점이 있다. 일방적으로 전개되는 흐름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영화에 비하면 독자가 주도권을 가진 편이다. 어쩌면 아직 글을 읽을 수 없는 아이의 특성이 그림책을 더 적극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장점이 될지도 모른다. 이미지 텍스트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사실 그림책뿐 아니라 사진책도 눈여겨볼 장르다. 사진이 보편화한 이 시대에 사진책의 역할이나 시도할만한 실험은 과거와 다르고 지금도 많은 흥미로운 시도가 되고 있지만, 한국에서 대중성을 고려했을 때 그림책이 아무래도 접근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왜곡되어 있긴 하나 교육열 높은 한국 부모들이 ‘책’이 어린 시절에 중요하다는 인식은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생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실천을 할 수 있는 매체로 그림책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림책이 예술 작품이라는 가정이 이 글의 전제이지만 보통의 ‘예술 작품’처럼 접근도 어려운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것이 가진 예술성과 상관없이 ‘만지지 마시오’라는 경고 문구가 붙지 않는 점이 큰 매력이기 때문이다. 대량 복제가 가능해서 가격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다. 한 권의 작품은 수백 수천 권으로 인쇄되어 세상에 나가지만 모든 그림책은 각 가정에서 모두 다른 이야기와 추억으로 태어난다. 독자의 나이가 어린 경우 책을 어른이 먼저 고르고, 결국은 둘 이상의 사람이 감상자가 된다는 것도 그림책만의 특징이다. 동시에 어른은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을 고르고 소리 내 읽으면서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그림책에는 이미지와 텍스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낭송을 통해 발생하는 소리가 만들어 내는 리듬이 있다. 그리고 그 리듬은 각기 다른 언어나 읽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또 모두 달라진다. 그림책은 ‘음악’이라는 요소를 가진 것이다.
경험을 통해 나는 아이를 위해 그림책을 고르기 시작하는 그 시점이 어른에게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림책을 매력을 느끼고 다시 적극적인 독자가 되어 노년이 되어도 그림책을 가까이하게 되는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작을 도와주는 서점과 도서관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수 있을지도 디자이너가 고민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현재 대형 서점에 볼 수 있는 그림책 전시대는 매체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인 디자인으로 독자가 책을 경험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고, 그나마 어린이 책 구역 바로 옆에는 책과 상관없는 장난감 구역을 붙여 놓아 매출이라는 오직 한가지 목표를 달성하는 데 열심이다. 작은 서점은 아예 지속 가능한 운영이 어려운 상황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림책을 접하면서 느끼고 알게 된 이야기를 풀어보았다. 그림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더 많은 사람과 이 재미난 매체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러한 마음만큼 그림책을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 디자인과 ‘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공부가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림책이라는 물성을 가진 생명체가 더 나은 디자인과 함께 더 큰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파티 인문과정에서 남은 기간 내가 고민하고 공부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