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사람/사기열전 史记列传

03 노자한비열전 - 춘추전국시대의 도가 및 법가 사상가를 소개한다

@walseek 2015. 4. 14. 02:37

150414_03 노자한비열전.pdf


>장주의 표정이 정말 너무 평온하고 즐겁기까지 해보여서, 좋아하는 이미지 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p78
노자한비열전의 작성 취지:
“이이(李耳, 노자의 성명)는 순리대로 일을 하면 모든 것이 저절로 돌아가고 탐욕과 욕망을 억제하면 사회나 개인이 모두 바로 된다고 주장했다. 한비자는 세상만나와 인간의 감정을 연구하여 통치자는 위세威势로써 군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뜻 노자와 한비자는 쉽게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도가와 법가의 공통점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도가의 핵심이 ‘자연'의 운행에 맡긴다이고 법가가 ‘법률과 제도’에 맡겨 그대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맡긴다는 것, 즉 무위无为인 것이었습니다.

p83-84
수단이란 공과를 따져 생사여탈의 권한으로 능력있는 신하를 통제하는 것. 정작 군주는 궂은 일을 안해 무위인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비자의 무위는 노자의 사상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오로지 통치자의 무위만 강조함으로써 통치자 이외의 사람들(오늘날 개념에서 부하직원, 서민)의 무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것 같습니다. 노자가 말한 무위는 모든 사람을 위한 무위가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통치자의 무위만을 강조하다보면 분명 다른 이들이 ‘무위할 수 있는 권리’는 침해되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법가의 무위는 노자의 핵심 개념을 차용했을 뿐, 노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과연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아니면 결국 노자 사상이라는 것도 전 우주를 말하려고 했으나 결국은 지배 계급의 국가 통치를 순조롭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상인 것인가 하는 질문도 생깁니다. (도덕경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해서 이런 소리를 하는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소위 엘리트를 키우고자 하는 현대의 서원에서 ‘도덕경’과 ‘국가론’을 외우도록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의혹이 증폭되는 면도 있는것 같고요. https://www.evernote.com/l/ATAcFsilpilEgZUcN91CEzoIvNV2ORhSzkg )

p87
“노자가 귀하게 여긴 도(道)는 선입견을 갖지 않고 상황에 맞게 변화하되 억지로 일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논지인데 내용이 미묘하여 주장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 장자, 신불해, 한비자의 학문은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도리를 연구했던 노자로부터 나왔다. 역시 노자가 가장 심오하고 원해하다.”

p83
이미지
초왕의 사절단을 거절하는 장자. 이 세상에 대가 없는 부귀영화가 어디 있으랴. 장자는 궁핍한 생활을 택할지언정 부귀영화로 인해 구속받는 생활은 사양했다.
>이 이미지를 보면서 저는 ‘아.. 나도 그렇게 살고 싶은데. 하지만 내 한 입은 내가 먹여살리고 싶다. 의탁하기 싫어.. 한달에 얼마를 벌어야 그렇게 살 수 있는 걸까? 어떤 일을 해야 평생을 남에게 빌어먹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죽을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을 꼭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웃기죠?

p94 중간쯤
한편 예기 증자문 편에도 무려 네 차례나 공자가 노담(老聃:dān 人名用字。老聃,即老子,姓李名耳,노자를 말함)에게 문의하는 내용이 나온다.

p97
읽으면 읽을수록 위궤양이 도진다는 그 구절-“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이다. 곧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명칭은 영원한 명칭이 아니다”
보드리야르의 한 구절과 통하는 느낌. 이름을 붙이는 순간, 사라지기 시작함을 이르는 말.

p98
특히 중국인들의 관념에는 우주와 자연 그리고 사회 및 인간의 관계가 대단히 미묘하게 연관되고 또한 상호 감응의 관계에 있다. 노자가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라고 한 알 듯 말 듯한 주장이나, 후세 중국인들이 즐겨 이야기하는 ‘천인감응天人感应’ 그리고 현대인들마저도 종종 거론하는 대우주와 소우주의 상호관련 등등이 모두 이런 맥락이다. 따라서 <노자>에서 보이는 사상은 겉으로는 도와 덕을 따로 논한 것 같지만 실은 곶감을 꿰듯 우주로부터 시작하여 인생을 논하고, 인생으로부터 다시 정치와 사회를 논하고 있다.

>저는 천인감응의 의미를 잘 몰라 찾아보았습니다.
天人感应,中国古代神学术语。中国 哲学中关于天人关系的一种唯心主义学说。指天意与人事的交感相应。认为天能干预人事,预示灾祥,人的行为也能感应上天。  汉 儒 董仲舒 在答 武帝 策问中作了具体阐述。 明 宋濂 《序》:“凡存心养性之理,穷神知化之方,天人感应之机,治忽存亡之候,莫不毕书之。”

함의: “天人感应”是指人与自然万物同类相通,相互感应。人是自然中的一份子,本来于天地万物为一体,相互溶入生息,只因识神分别之故、渐脱离自然……正如《易经》上所讲,如一个人心性洁静,那么就可以“寂然不动、感而遂通”。

>하늘이 사람의 일에 관여할 수 있으며, 사람의 행동도 하늘에 통할 수 있음을 말하는 걸로 보아, 어떤 사람들은 미신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사람과 하늘의 뜻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데이터로 증거를 대거나 회장님 말씀이 아니면 움직일 수 없는 조직에서 9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하늘, 우주의 뜻 이런 단어가 굉장히 생소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다니고부터 몇 몇 선생님들의 이야기와 실제로 내가 경험을 하고서 과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내 자신의 예감, 혹은 우주의 기운, 뜻같은 것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관련된 에피소드를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무튼 전에는 ‘이게 무슨 소리래?’라고 받아들였을 수 있는 이야기를 지금은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많이 이야기한다는 천인감응도 제가 생각하는 그것과 유사한것 같습니다.

p100
한자는 통상 그 자체에 형음의形音义 3요소를 구비하고 있다. … 해당 한자의 형음의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종종 그 글자에 내포된 원시적인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원시적 메시지란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중국인들을 일컬어 보통 현실적이라 하는데, 한자를 보아도 그런 특성이 나타난다. 한자에는 추상적인 글자가 거의 없다. 대부분 구체적인 글자다. 한자는 기본적으로 상형문자이며, 상형문자가 발전하여 형성자形声字로 가면서도 역시 그 형(사물의 모습)만은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지식인층은 이렇게 구체적인 글자를 가지고 어쩜 그렇게 형이상학적인 표현만 잔뜩 쓰는건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철학적인 내용을 이야기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지난주에 중국에 유명한 북 디자이너인 뤼징런 교수가 학교에 와서 3일간 워크샵을 했습니다. 책이란 무엇인가, 책을 대하는 디자이너의 자세는 어떠해야하는가가 주된 강의의 내용이었는데, 그 내용을 통역하다가 정말 머리가 터질뻔 했습니다. 그분의 입이 열리기만 하면 어찌나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의 고급진 단어들이 튀어나오는지. 들어서 어떤 한자인지 머리속으로 그릴 수 있어도 한국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걸 보면서 한자라는 뜻글자가 가진 엄청난 축약성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저의 저질 중국어가 뽀록난 것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자는 이토록 구체적인 내용 속에서 만들어져다니,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p109
노자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문제를 확실히 고려했다는 점이다.
인간의 생로병사 문제는 현재 자연스로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노자가 보기엔 인간이 이른바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갖가지 탐욕과 욕망이 인간의 정기를 소모시켜 정신적인 안정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즉 ‘도’의 담백하고도 조용한 이른바 무위의 상태를 저버렸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생리적으로 평형을 잃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믿었다. <노자> 23장에서 “돌풍은 오전을 넘기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飘风不终朝,骤雨不终日  piāo fēng bù zhōng zhāo, zhòu yǔ bù zhōng rì 暴风刮不完一个早晨就会停息。比喻来势虽猛,但持续的时间不会长久。骤:急速。急雨不会下一天。比喻坏人坏事不会长久。)”고 했듯 불안한 생활은 오래 유지되기 힘들다.

말달릴 취 (표풍부종조, 취우부종일.)
>여기서 은 ‘’ 의 뜻으로 쓰인것 같음. 고대의 终에는 1. 종료, 결말 终了,结尾 2. 죽음 死 3. 시종 始终 4. 다하다(尽) 5. 즉(既) 6. 결국(终于) 등의 뜻을 지님. (고대한어사전, 상무인서관)/ 
>통학이 너무 힘이 들어서 파주로 이사가려고 이리 저리 머리를 굴리던 때에 이 글을 읽었습니다. 지옥철과 지옥버스(합정에서 파주를 다니는 유일한 광역버스 2200번은 출퇴근 시간에 지옥버스로 변신합니다.)에 시달리다보니 이성을 잃고 파주로 차라리 이사를 가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속으로는 분명 그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것만이 답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무위의 삶이라는 것을 일반인인 저 같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은 불안한 생활은 결코 오래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동의학’수업을 듣는데 동의학의 내용 안에도 사람이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노자가 말한바와 비슷하게 설명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동의학은 한의학의 영향을 분명히 받은 것이기 때문에 아마 한의학이 노자 등 중국 고전의 정신이 오랜 시간 쌓여 현재의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이라는 것이 중국인의 만물을 보는 관점이 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p109
만족에 집착하느니 적당한 선에서 그치느니만 못하다. 겉으로 너무 드러나는 것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금옥이 집에 가득하면 전부 지킬 수 없으며 부위영화를 누리면서 뽐내면 재앙을 입는다. 공(功)을 이루고도 뒤로 물러서는 게 자연의 도리다. 持而盈之,不如其;揣而锐之,不可长保;金玉满堂,莫之能守;富贵而骄,自遗其咎。功成身退,天之道。 <노자> 9장 

>이 부분도 지금의 저에게 주는 울림이 컸습니다. 제 성격탓인데요, 제가 만족을 모르거든요. 그러면서 계속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하며 무언가를 추구합니다. 9년이라는 회사 생활에서도 크게 만족을 느낀적이 없습니다. 항상 다른 길을 꿈꾸었죠. 그리고 다른 길을 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결과는 그렇지 않더군요. 다른 길 안에서도 더 많이, 더 높이를 바라보며 괴로워하는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아주 절망적이었죠. 이렇게 살다가는 평생을 고통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과 욕심을 가진다는 것이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천년 전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이 욕심에 의해 고통받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고 그런 점에서 조금은 위로가 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왜 인간은 똑같은 마음에 의해 끊임없이 괴로움을 반복할 수 밖에 없을까를 한탄하게 되었습니다.  

p111 
‘도’의 활동영역은 사회와 정치 분야로까지 확대된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생산성은 높아지고,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잉여물품은 많아진다. 그러면 인간의 탐욕도 강해질 뿐 아니라 이를 차지하려는 투쟁 역시 더욱 심해진다고 노자는 생각했다. 투쟁이 심해질수록 인간의 마음도 더욱 잔인해진다. … 특히 일단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정권을 유지하면서 도전을 뿌리치기 위하여 교묘하게 법률을 제정하여 가혹하게 집행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법령이란 권력자의 탐욕을 합법적으로 보장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개인적인 탐욕을 위하여 ‘일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노자가 이야기하는 유위(유위(有爲, 뭔가 하는 것)다. 일단 ‘일을 벌이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노자는 75장에서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윗사람들이 과도하게 세금을 거두기 때문이다. 백성을 다스리기 힘든 것은 윗사람들이 자꾸 일을 벌이기 때문이다. <노자, 75장>
原文
民之饥,以其上食税之多,是以饥。民之难治,以其上之有为,是以难治。民之轻死,以其上求生之厚,是以轻死。夫唯无以生为者,是贤于贵生。—选自老子的《道德经》第七十五章
译文
人民所以遭受饥荒,就是由于统治者吞吃赋税太多,所以人民才陷于饥饿。人民之所以难于统治,是由于统治者政令繁苛、喜欢有所作为,所以人民就难于统治。人民之所以轻生冒死,是由于统治者为了奉养自己,把民脂民膏都搜刮净了,所以人民觉得死了不算什么。只有不去追求生活享受的人,才比过分看重自己生命的人高明。 

>ㅋㅋㅋ왠지 웃픈 이 구절. 그런데 격하게 공감되는 이 구절 
>왠지 이 부분은 지금의 세태를 염두에 두고 이쌤께서 쓰신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재와 유사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법령이 권력자의 탐욕을 보장하는 도구로 전락한 상황이 바로 그것입니다. 군대는 북과 외세로부터 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기능만 남고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역할은 상실했죠. 지금의 법률은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 되어버렸구요.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하나 막막해집니다. 

p112~113 
무위?
1. 무위란 적당히 관여하거나 혹은 전혀 관여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발전하게끔 놔두란 뜻이다. 자연스럽게 가는 것을 억지로 통제하지 말라는 뜻이다. 
2. 무위란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노자 80장에 보이는 다음 광경은 노자가 이상형으로 그리워했던 국가 형태다. 

  닭과 개 울음소리가 서로 들려도 사람들은 늙어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할 일이 없다. 

노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란 소국과민이었다. 소국과민이란 작은 규모의 적은 백성을 말한다. 말하자면 “사람의 머리를 굴리게 하는 각종 기계가 있어도 굳이 사용하지 않고, 사람들의 이동을 편하게 하는 마차나 배가 있어도 사용하지 않고, 남을 해칠 수 있는 무기가 있어도 건들지 않고, 사람들은 원시시대로 돌아가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순박한 풍속 속에 편안히 살기 때문에 설사 옆 동네의 닭과 개 울음소리가 들려도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할 일이 없는” 그런 세계다. 이와 같은 사회가 되어야만 사람들이 자유롭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고 노자는 생각했던 것이다. 

p114
삼라만상의 근원으로서의 ‘도’, 인간의 근원으로서의 갓난아이, 사회의 근원으로서의 소국과민, 이 3단계의 천지인 관계는 삼위일체로서 우주를 논하건 사회를 논하건 아니면 인생의 문제를 논하건 간에, 무슨 일을 억지로 벌이지 않고, 또한 담백하고도 조용한 마음을 한결같이 가져야, 인간도 사회도 국가도 오래도록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너무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사람이 셋 이상만 모여도 그 안에서 정치적인 계산과 파벌이 생기는 것이 우리 사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른 사회는 어떤지 모르겠고 제가 경험한 한국의 수도권 사회라는 것은 분명히 그런것 같습니다. 설사 소국과민의 삶이 가능하다고 해도 모두 다같이 소국과민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지 않을까요? 어떻게 보면 결코 이루지 못할 이상향에 대한 이야기 인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p116 
이렇듯 옛날 책은 어떤 책을 막론하고 전래 과정 및 편집 문제가 복잡하다. 

> 결국 노자, 장자 등 모두 한 천재 사상가의 지혜를 그대로 담았다기 보다는 그를 시작으로 후대 사람들의 지혜가 축적된 결과물로 보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누군가에 의해 ‘편집된’ 결과물이니까요. 고전 텍스트를 맹신하는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문장이었습니다. 맹신할수도 없고 무시할 수도 없는 이 고전이라는 것을 만날때 우리는 어디까지 그 선을 그어야 할 것인지. 결국은 각자 자신만의 선을 어떻게 만들것인가에 관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것은 삼키고 쓴것은 뱉어내는 방식은 물론 옳지 않을텐데요, 고전을 대하는 ‘옳은 태도’라는 것이 있을까요? 

p117 
노자가 비록 장자의 원조라고 할 수는 있어도 노자 사상으로 장자를 모두 포괄할 수는 없다. 노자가 현학적인 이야기를 한 것 같지만 실은 인간사를 중점적으로 논했다. 이에 비하여 장자는 오히려 ‘도’를 더욱 깊게 논했다. 또한 노자는 통치술에 치중한 반면 장자는 개인 정신의 자유와 초월에 중점을 두었다. 한편 노자가 생명의 고귀함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장자는 삶과 죽음의 한계를 초탈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단지 장자는 제자백가 중에 노자를 가장 존경했으므로 함께 도가 인물이라 간주할 뿐이지 실은 노자보다 스케일이 훨씬 광활하다. 

p119 
사람이 이 우주 속에 살아가면서 구속받는 가장 큰 장해물은 이상 세 가지—자아, 업적, 명예—이므로, 만약 이 세가지를 모두 떨쳐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광대무변한 무의 경지로 들어간다면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초탈을 맛볼 수 있다. 장자는 이 무가 바로 도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어떻게 해야만 이러한 무의 경지로 진입할 수 있을까? 장자의 답변은 이러하다. ‘지식과 욕망의 질곡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라.’  … 인간은 무지한 혼돈의 상태에 있을 때 오히려 천성을 유지하며 영원히 자유로워 질 수 있다. 일단 인간의 이지가 깨이면 오히려 이지의 속박을 받고, 또한 욕망이 깨이면 욕망의 포로가 되기 쉽다. … 인간이 일단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면 각종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하며, 이로 인해 갖은 고뇌와 고통이 따른다. 

p120 
지혜가 있고 마음이 선량한 순임금을 데려다가 왕위에 오르도록 한 요임금. 그 결과 순임금은 나이가 들어 꼬부랑 할아비가 되었음에도 한적한 노후생활을 보내지 못하고 국정을 운영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몸을 굴려 스스로 구속하는 일이다(形老自役).’ 
흔히 하는 말로 ‘사서 고생한 격’이 되었다. 장자 <인간세> 편에서 “산의 나무가 목재감이 되면 허리가 잘리고, 등잔불이 타지만 실은 제 몸을 태우는 것이며, 계수 열매가 먹을 만하면 가지까지 꺾이고, 옻나무가 쓸 만하면 거죽마저 벗겨진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저의 옛 회사 생활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중국어를 한다는 이유로 중국 출장만 가면 얼굴 근육이 마비될 때까지 통역을 시키던 팀장이 떠오르네요. 그 후로 디자인 부서로 옮겼는데, 제가 디자이너가 아니고 관련 툴도 잘 다룰줄 모르다 보니 저한테 시킬 수 있는 일이 많이 없더군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무용지물’이 크게 나쁜 것은 아니구나. 물론 내가 원하는 분야에서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불쾌한 일이겠지만 소모만 되는 곳에서 ‘유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경험했습니다. 

p121 
무심(無心)
‘일반 사람은 이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사대부는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심지어 성인까지도 세상을 위해 목숨을 건다.’  장자 <변무편>
 
장자는 한결같이 가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인생의 목적이 정신의 자유와 영원을 추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명예나 권력 등에 미련을 가져서도 안 되고, 또한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그대로 방치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한 ‘무기’, ‘무공’, ‘무명’이어야만 비로소 절대적인 정신적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p124
인간이 명예, 지위, 혈육의 문제, 심지어 삶과 죽음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심’의 마음가짐이 있어야만 비로소 이해득실과 기륭화복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하여 자유로운 정신을 얻을 수 있음을 장자는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성인까지 세상을 위해 목숨을 건다—는 생각은 지금껏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입니다. 어떤 고귀한 것이 되었든 ‘연연하는 것’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자식이 있는 사람이 과연 ‘무심’의 상태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많은 종교인들, 소위 세속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출가를 하고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인가. 그만큼 이르기 어려운 경지의 것인가하고 말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이익보다는 명예를 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당장 누가 강남에 빌딩을 가진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던가, 친구가 나보다 좋은 경제적 조건으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을 볼때, 마음이 혼란스러워 지는 것을 느낍니다.
왜 사람은 자신이 가진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항상 남과 비교하며 괴로워하게 되는 것일까요. 만약 이런 마음이 제가 꼬부랑 할머니가 되서까지 지속된다면 그 삶이 얼마나 비참한 것일까요.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멀리 두는 것이 답이 될 수 없는데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이유로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멀어지나 봅니다. 장자가 제시한 ‘무심’의 개념을 머리로 이해하지만 마음으로 어찌 실천해야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흑흑….

p124
천인합일(天人合一)
노자의 절성기지(绝圣弃智, 성인을 없애고 지혜를 버림)로부터 장자의 ‘무심’에 이르기까지 도가 사상의 흐름은 개인의 정신적 자유와 진실한 존재의 추구 쪽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장자가 지향했던 인생의 바람직한 경지는 초월적인 해탈의 경지로, 우주와 인류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궁극적인 의미가 과연 무엇이냐에 있었다. … 서로 통하고 서로 연관되고, 궁극적을 추구하는 바가 서로 일치하는 ‘천인관계’의 관념은 후세 중국인, 특히 중국의 예술가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후우.. 노자, 장자와 관련해서는 생각할 거리도 많고 기록해두고 싶은 부분도 많네요. 이제 법가 사상으로 가보겠습니다. 

126~127p
한비자는 법가 사상의 3대 유파였던 신불해의 용인술, 신도의 위세, 상앙의 법치주의를 통합하여 집대성한 인물이다. … 한비자의 주장은 노자 사상의 음험한 측면을 정치적으로 최대한 발휘하여 군주에게 복무토록 하는 이론 체계다. (p128)

“상벌은 날카로운 물건으로서 군주가 관리를 제압할 수 있는 좋은 도구다. 그러므로 군주는 상을 내릴 때나 벌을 내릴 때 미리 정보를 흘려서는 안 된다. 일단 정보가 새면 관리들은 상을 준다는 정보로 해당자에게 공치사를 할 수 있고, 벌을 준다는 정보로 해당자에게 위세를 부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국가의 날카로운 물건은 함부로 보여줘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관리들 앞에서 호오의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동시에 구눚의 의중을 간파할 수 없도록 연막을 쳐야 한다는 의미다. 

무릇 노련한 통치자는 노자 사상과 법가 사상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 한고조 유방의 아들 효문제는 유명한 현군이었는데 겸손함과 잔임함을 동시에 능란하게 구사하였다. ‘겸손함’은 노자의 수단이고, ‘잔인함’은 법가의 수단이다. 말하자면 겉으로는 도가 사상을 표방하면서 속으로는 법가 사상으로 다스렸다는 뜻이다. 

p130
노자가 권유했다시피 “받기 위해 먼저 주었던 것이다.”

>얼마전 학교에서 있었던 북 바인딩 워크샵의 스승인 뤼징런 교수가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와 일할때 어떤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위와 상통하는 답을 주었었는데 때마침 이 구절을 만나게 되었네요. 요지는 클라이언트와 일할때 원하는 바를 쟁취하려면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줄 알고 그 후에 두 걸음 앞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p132 
효문제 시절에 황로(黄老)사상이 유행했다. 황로란 황제와 노자를 일컫는다. 노자보다 더욱 오래된 전설적인 제왕을 들먹여 자신의 주가를 올리려는 한나라 초기 도가 사상가의 작품이다. 따라서 황로 사상을 노자 사상으로 간주한다 하여 틀린 것은 아니다. 한나라 초기 효문제 시절의 황로사상은 노자 사상 속에서도 특히 정치적인 술수가 강조된 이론이었다. 

“끌어들이려면 먼저 풀어주라. 약화시키려면 먼저 강화시켜라. 망치려면 먼저 발전시켜라. 뺏으려면 먼저 주어라. 이렇게 하는 것이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적극적인 방법이며 유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요령이다.” 노자 36장 
将欲歙之①,必固张之②;将欲弱之,必固强之;将欲废之,必固兴之;将欲取之③,必固与之④。是谓微明⑤,柔弱胜刚强。鱼不可脱于渊⑥,国之利器不可以示人⑦。



> "鱼不可脱于渊,国之利器不可以示人。"
  国家的刑法政教不可以向人炫耀
  마지막 질문입니다. 밑줄 친 부분을 ‘백성앞에 교만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석해도 될까요? 앞에서는 무기를 보여선 안된다라고 해석하신것을 보았는데 어떻게 해석해야 맞을까요? 



제3장 노자한비열전은 여기까지 입니다. 감사합니다! 

ps 인쇄해서 보실 수 있게 pdf 파일을 첨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