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사람/글 text

세상 공평하면서 불공평한 코로나19

@walseek 2020. 3. 5. 15:01
요즘 아이와 집에서 파고 있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지구의 밤»의 한 장면입니다.
요즘 같은 때에도 회사원은 일터로 갑니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수입이 있는 제 남편은 오늘도 회사에 갔습니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일이라 재택으로 돌려질까 하는 기대도 있었는데 회사에서 한꺼번에 팀이 폐쇄되는 것을 우려해 팀을 반으로 나눠 공간을 분리해 일하도록 했다고 하더군요.

한팀이 무너져도 일이 계속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말입니다.

의료 계통의 일이기에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저도 공감합니다. 하지만 이런 회사의 결정을 들은 당사자가 처음으로 본인 입으로 자신이 ‘쓰고 버리는 휴지’가 된 것 같다고 하더군요. 평소에 회사와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이 있던 사람인데 말입니다. 회사의 ‘부품’인 사람—회사원.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가 직접 ‘휴지’를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저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주 양육자, 엄마입니다. 꽉 채운 2개월의 겨울방학이 엄마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제야 알게 된 작업자이기도 합니다. 겨울방학이 끝나가는 시점에 터진 코로나19 사태로 지칠대로 지쳐버린 저는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진실이 사람의 말문을 막아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득 엄연히 존재하는 육아 노동에 대한 비용을 임금으로 책정해 지급하게 되어있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가 육아 의무가 있는 피고용인을 이런 재난 상황에서 재택으로 돌리지 않을 시, 피고용인이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그것을 가족들에게까지 옮길 수 있는 리스크가 발생합니다. 동시에 개학 연기 등으로 추가 발생한 육아노동을 누군가 부담해야 하므로 또 비용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모든 비용을 회사나 정부가 혹은 반반씩이라도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면 과연 한국의 부모들이 이런 상황에 몰리게 되었을까요.

한마디로 엄마들이 언제든, 정말 말 그대로—언제든— 24시간 육아를 책임질 수 있다는 가정하에 회사나 정부가 지금의 효율(!)로 운영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공짜이기 때문에 ‘굳은 그 돈’이 계속 ‘누군가’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는 분명 엄마들은 아니에요. 그러면서 누군가는 계속 이런 메시지를 던집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무엇보다 고귀한 일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이라는 보상이 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불평하는 너는 천하의 나쁜 엄마다”. 이 목소리는 제 안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말도 있던데, ‘보람 말고 보상을 주세요’던가요… 

물론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계속 돈을 벌어야 하고, 누군가는 계속 아이를 돌봐야 하고, 아이가 줄면 사회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지요. 하지만 아빠는 회사에 손해를 끼치면 안되기 때문에 계속 출근을 하고, 엄마의 육아 노동은 공짜이기 때문에,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가택 연금에 가까운 생활이 반강제됩니다. 그토록 소중하다는, 사회의 근간이라는 한 가정안에서 이런 모순된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19는 누구에게나 옮길 수 있지만 떠안아야 할 리스크는 젠더와 계층에 따라 너무나 다릅니다. 

하지만 제가 안고 있는 모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비판하는 그 ‘누군가’가 현재는 이 가정의 생계를 책임진 그들 중 하나니까요. 남편을 휴짓조각처럼 다루는 그 회사에 문제가 생기면 내 가정도 흔들립니다. 따라서 이런 생각을 글로 쓰는 제가 바보일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것이 여성으로서 정신이 분열하게 되는 지점일까요? 저는 자본이 모든 것을 결정해버리는 이 세상에서 착취와 축적 말고 다른 생존 방식은 없는 것일까 끊임없이 생각하는 천치(天癡)가 맞는 것 같습니다. 

겨울방학에 얹힌 코로나19를 살아내고 있는 엄마들(가끔 아빠들)의 이야기가 더 많아지길 바랍니다. 맘카페에 올라오는 ‘죽겠다’는 글들은 분명 거기에 있지만 폐쇄된 커뮤니티 안의 그 글들은 아줌마들의 푸념으로 치부되고 남지를 않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기록으로 남지 않는 경험들은 그냥 그렇게 사라지게 됩니다. 여자들의 목소리는 증발해버립니다. 이 글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내 아이가 커서 읽게 될 수 있을까요? 그때 부끄럽지는 않을까요. 

오늘 저는 시어머니가 잠시 아이를 맡아주신 덕에 장장 두 시간을 생각의 흐름에 끊임이 없는 상태로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네. 육아 노동은 결코 증발하지 않습니다. 매분, 매시간이 세상 공평하게도 엄마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해야만 하면서 세상 불공평하게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와 보상이 다른, 세상 유일무이한 특수 노동이랍니다. 아이는 개학이 연기되어 신이 나고 할머니 집에 가서 또 신이 났습니다. 나도 아이처럼 신나게 작업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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