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있는 글없는 그림책들을 떠올려보고, 직접 찾아보는 과정에서 마리 칸스타 욘센의 『안녕』을 생각했다. 『안녕』에 글이 있었던가? 표지를 보며 떠올려보려 했지만 헛갈려서 조금 당황했다.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꿈꾸는 포프』에는 글이 없었다고 생각했고, 반대로 『안녕』에는 글이 있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아마 내 생각에 적지 않은 양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안녕』에 분명히 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것 같다.
많은 어른들은 사실 글없는 그림책을 아이들에게 읽어주기 어려워한다. 반면 아이들은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다. 특이한 점은, 내 아이에게만 해당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글없는 그림책을 아이와 함께 볼 때는 아이가 내게 꼭 ‘읽어달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이 책을 보면서도 이야기를 매번 조금씩 다르게(?) 지어내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이 과정 속에서 내 머리속에만 존재한 그 텍스트들이 이미지와 함께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심상으로서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놀라운 점으로 두 가지를 말 할 수 있겠는데, 하나는 무엇보다도 디지털 드로잉의 새 ‘맛’을 선보인 것이다. 디지털 드로잉은 그동안 그림책에 수없이 사용되어 왔지만 어떤 작품도 이 정도로 디지털 브러시맛(!)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제대로 살린 경우는 없었다(고 확언하긴 곤란하고, 내가 지금까지 본 작품 중에서 그러하다). 물론 손그림을 적절히 같이 활용한 것은 확실하지만, 디지털 작업이 작업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유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데 기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나는 책에 등장하는 흰토끼들이 사는 그 섬은 다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이 책 세계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라고 느낀다.
두번째 놀라운 점은 텍스트를 충분히 사용해도 되었을 이 책에 텍스트가 없다는 것이다. 이 정도 내러티브를 가진 그림책은 대체로 글이 있다. 그런데 어느 그림책을 살펴보아도 그렇고, 직접 작업도 해보았지만 글이 보통 그림과 완벽히 중복되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인것 같다. 더군다나 텍스트가 있는 그림책은 아무래도 (어른의 경우) 텍스트에 먼저 눈이 간다. 내 생각엔 그 과정에서 분명히 독자가 그림에서 충분히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을 자기도 모르게 스쳐지나가는 경우가 많은것 같다. 최소한 내 경우는 그러하다. 그림으로 소통하는 것이 익숙한 그림책 작가들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이 책은 글을 써도 될만한 이야기에 전혀 글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서 독자가 페이지마다 머무르는 시간을 더 길게 가져가도록 한다. 색채와 선의 움직임, 빛과 어두움, 바다 위 공기 중에 느껴지는 짠내 같은 것들이 글이 없기 때문에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독자는 글이 없는 자리에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간다. 주인공의 이름부터 목소리, 말투까지 독자가 천명이라면 천명의 다른 주인공이 탄생하는 것이다. 획일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고정된’ 텍스트를 제거함으로써 그림책 안에서 독자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는’ 소리에 좀 더 귀기울이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없는 그림책은 이렇게 독서 경험이 가진 개인적인 면을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사족1. 책에서 교훈을 꼭 찾아야 하고, 줄거리를 요약하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경험만 풍부한 한국 사람들에게 글없는 그림책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사족2. 조금 아쉬운 것은 디자인이다. 우선 이 책 제목의 위치가 실질적으로 중앙에서 살짝 왼쪽으로 밀려간듯 보인다. 책등과 도랑 부분까지 전부 포함한 것을 표지의 가로 길이로 둔 것 같다. 또한 출판사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로 표지에 수상내역 등을 인쇄로 박아버리는 디자인에 반대한다. 마케팅을 위해 띠지나 커버에 수상 내역을 싣는 것은 어쩔수 없지만 작품을 소장하는 독자들을 좀 더 배려해주면 좋지 않을까. (물론 어떤 배려에는 돈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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