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로 시작하는 그림책이 있다.
바로 사노 요코의 『태어난 아이』다. [※스포일러 주의※ 아이는 결국 태어난다(!)]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는 책에 관해 글을 쓰는 일은 어렵다. 이 책을 왜 좋아하는지를 이야기하다보면 나에 관한 너무 많은 것들이 보여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다. 또한 생각을 앞지르는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친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렴 어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내가 좋으면 그만인데. 누구를 설득하려는 생각은 없다. 다만 지금은 세상에 없는 작가에 대해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것이, 마치 받을 사람 없는 편지를 쓰는 것 같이 느껴져 오로지 나를 위한 글을 쓸 때 오는 낯간지러움을 피할 수가 없다.
사노 요코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더 이상 새로운 작품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졌다. 나는 그저 그녀가 남긴 몇 권의 책 중,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책들만 근근이 읽고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내게 사노 요코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 글을 쓰기 전 나는 사노 요코의 그림책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 중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모든 작품이 인생 그림책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노 요코는 내게 『태어난 아이』를 남겨주었다. 그리고 다수의 재미있는 에세이들도. 사노 요코에 관해 글을 쓸때 또 한번 용기를 내야만 하는 것은 그녀의 에세이 중 상당 수에서 (심지어 몇몇 그림책 마저도) 반페미니즘의 흔적을 느낄 수 있어서다. 심지어 에세이에서는 국수주의적인 표현도 가끔 등장한다. 그런데도 재미가 있어서 괴롭다! 그녀가 1938년 생인 것을 감안하면 이해가 되면서도 안타깝다. 동시에 일본어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재미있는 책들을 많이 읽을 수 있을까 하는 더 괴로운 생각마저 슬그머니 드는 것이다. (심지어 일본어판은 아름다운 세로쓰기로 디자인되어 있단 말입니다, 흑.)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 아이는 어떤 일을 겪어도 아프지 않았다. 왜냐하면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던 그 아이는 한 여자 아이를 만난다. 그 여자 아이가 다쳐서 엄마에게 달려가 아프다 울고 위로받고, 엄마가 여자 아이에게 반창고를 붙여주는 장면을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목격한다. 아이는 ‘반창고가 붙이고 싶어졌’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반창고! 반창고!를 외치며 “엄마”하고는 마침내 태어난다. 태어난 아이는 아파서 울기도 하고, 배고파 하고, 엄마의 보살핌을 받는다. 물고기를 보면 잡으러 가고, 모기한테 물리면 가려워한다. 바람이 불면 깔깔깔 웃는다. 여자아이에게 “내 반창고가 더 크다!”고 외치기도 했다.
밤이 되자 아이는 “이제 잘래. 태어나는 건 피곤한 일이야”라고 말하고 푹 잠이 든다.
난 남의 그림을 갖고 이러쿵 저러쿵 할 입장이 못된다는 생각이 들지만, 판화 기법으로 표현된 남자 아이의 모습은 역시 일반적인 그림책 속 아이의 모습은 아니다. 사노 요코 그림책 주인공들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한데, 귀엽다기 보다는 조금 차갑고 무심해보인다. 색 또한 일반적인 화려함이나 환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고 느껴진다. 책 전체에 딱 네 가지 색(빨강, 녹색, 파랑, 노랑)만 쓰이고 주로 쓰이는 빨간색과 녹색의 선이 다소 거친 그림체다. 이 색과 선이 뭐라 말로 형용하기 힘든 느낌을 자아낸다. 그냥, ‘태어난 아이의 느낌’이다.
이 주인공은 어떤 극적인 사건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반창고! 반창고!하고 외치고 ‘엄마!’하면서 태어나는 장면이 가장 극적이라면 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그 장면에서 조차 주인공은 절대 과한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난 이 요상한 주인공 아이가 빵 냄새를 맡을 때, 모기에 물려서 가렵고, 바람 불때 웃는 모습을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한번도 아니라 여러번. 내가 책을 읽어주다 말고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것을 볼 때 나의 ‘태어난 아이’는 날 조금은 신기한듯, 걱정되는듯 바라보며 ‘엄마 울어?’하고 물어본다. 나는 ‘응.’이라고 슬며시 웃으며 대답한다. 그리고 (외람되고 창피하지만) ‘아~~~ 이 책 정말 미친것 같아. 이런 책 한 권만 만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말하곤 한다.
나는 삶이란 고통 뿐이라는 생각이 들때, 이 책을 읽고. 읽고. 또 읽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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